앙트레 누,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우리가 나이를 먹고, 사람들을 좀 겪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사연 없고 아픔 없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줄거리>
여기, 누구보다 아픔과 시련 덩어리로 빚어진 세 사람이 있다. 겉으로는 셋 다 자기 위치에서 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명문 사립학교인 바튼 고등학교의 역사교사 폴은 완고하고 꽉 막힌 사람이며 학생들에게 매우 엄격하다. 걸핏하면 말썽을 일으키는 문제아 털리는 부잣집 아들이다. 구내식당 주방장 메리는 요리 솜씨는 끝내주지만 무뚝뚝하고 정이 없어 보인다.
2주 간의 크리스마스 방학을 맞아 모두 가족과 함께 보내기 위해 각자의 가정으로 가지만, 함께 휴가를 보낼 가족이 없는 세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학교에 남는다. 고지식한 폴은 하나 남은 학생 털리를 선생으로서 책임지고 보호하기 위해(사실 보호할 ‘아이’라고 하기엔 2년 유급을 당해서 너무 크고 성숙하지만) 고군분투한다.
털리에게 가족이 없는 건 아니다. 부모가 이혼해서 아빠는 정신병원에 있고 엄마는 재혼했는데 뒤늦게 신혼여행을 간다며 크리스마스인데도 털리에게 집에 오지 말라고 한다. 그녀는 아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 대신 돈을 보낸다. 그녀는 평소 크리스마스에 가족이 모여도 배달음식을 시켜줄 뿐 직접 가족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준 적이 없다. 털리는 현재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있다.
어려서 엄마가 죽고 아버지는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폴은 열다섯 살에 바튼 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해 이곳에서 교사까지 됐다. 결혼도 하지 않아서 그는 혼자 늙어가는 중이다.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특이한 질병을 갖고 있고 그 역시 항우울제를 복용중이다.
메리는 유복자를 낳았는데 아이가 공부를 잘했지만 대학에 보낼 돈이 없어 대신 군대에 가게 된다. 하지만 얼마 전 그 아들마저 죽었다.
자, 이쯤 되면 세 사람이 티격태격하다 서로 아픈 사연을 알게 되고 마음을 열게 되는 이야기겠구나...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맞다. 그런 이야기다. 그다지 새로울 것은 없다. 하지만 그 과정이 매우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다. 인물들이 서로에게 과장된 감정을 드러내면서 신파로 흐르지 않는다. 이들은 서로의 아픔, 슬픔, 약점을 들켜도 섣불리 위로하거나 동정의 말을 꺼내지 않는다. 그저 ‘너도 나만큼 아팠겠구나...’ 하고 말없이 공감의 표정을 보일 뿐이다. 그리고 이루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상대방의 꿈을 응원해 준다.
2주 동안 그들은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유사 가족’이 되어준다. 그 모습은 셋이서 크리스마스 저녁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명확하게 표현된다. 털리가 말한다. 이런 가족 같은 크리스마스 분위기의 식사는 처음이라고. 그 순간만큼은 한 번도 자기 가정을 이룬 적이 없는 폴에게 메리와 털리는 아내와 아들이 되고, 털리에게 폴과 메리는 부모가 된다. 메리에게도 두 사람은 남편과 아들이 된다.
세 사람은 답답한 학교를 벗어나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시내로 나간다. ‘현장학습’이란 명목으로 나가서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폴과 털리. 그 시간을 보내며 두 사람 사이에는 서로의 잘못을 덮어줘야 하는 순간들이 생겨난다. 둘은 그때마다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앙트레 누)이야’라고 말한다.
폴이 해고당할 위기에 처하자 털리가 거짓말을 해서 그가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첫 번째 앙트레 누. 폴이 우연히 길에서 만난 대학 동창 앞에서 자신의 처지에 대해 거짓말을 할 때 털리가 선생님을 위해 함께 거짓말을 해주는 두 번째 앙트레 누. 그리고 털리가 퇴학당할 위기에 처하자 그의 잘못을 대신 뒤집어쓰는 폴의 가장 크고 결정적인 앙트레 누.
어쩌면 루저 중의 루저라고 할 수 있는 폴이지만 새 출발을 하는 그의 앞날이 어둡지만은 않을 것이다. 소논문을 써서 책으로 출간하는 것이 꿈이라고 하면서도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그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서로의 비밀, 앙트레 누를 나눠 가진 사람들이 있는 한.
폴 역을 연기한 배우의 섬세하면서 정확한 표정 연기가 일품이다.
이 영화의 제목은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이번 연말 공연에서 이승윤이 언급한 덕분에 또 한 편의 좋은 영화를 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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