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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ssue

송구영신에 묻는 신의 뜻

호주에 워킹홀리데이로 가 있는 조카에게서 카톡으로 동영상이 왔다. 호주 현지의 새해맞이 카운트다운 불꽃놀이 행사를 찍은 영상이었다. 사람은 전혀 없고 불꽃놀이와 사람들의 목소리만 담겨 있는 영상이었지만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다소 들뜬 분위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조카에게 답을 보냈다. 지금 한국은 너무나 우울한 연말연시를 보내고 있다고. 너라도 근심 걱정 없는 곳에서 지내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조카가 만일 지금 이곳에 있었다면 그 아이도 윤석열 탄핵 집회 현장에 나갔을까. 누구의 덕후도 아니니 친구들에게 응원봉을 빌려서 들고나갔을까.. 그 아이가 워홀 기간을 모두 마치고 돌아오는 5월이면 세상에 흐드러진 꽃향기와 함께 이 나라에서도 온전한 봄날을 누리게 될까.

 

 

호주 시드니의 새해맞이 불꽃놀이

 

어젯밤에는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로 가는 길에 시청 광장에 마련된 제주항공 참사 희생자들의 합동분향소에 들러 참배를 했다. 사진은 생략된 채 꽃들로만 장식된 제단 앞에 서니 일면식도 없는, 기사로만 접한 이들의 가슴 저미는 사연들이 잠시 떠올랐다.

 

얼마 전 결혼한 신혼부부는 달콤한 꿈같았던 허니문을 마치고 돌아오다 단 하루도 함께 결혼 생활을 못해보고 가버렸다. 세 살된 아이와 함께 첫 해외여행을 떠났던 젊은 부부는 SNS에 즐거웠던 순간들을 사진으로 올려 그들이 이 땅에 살다 간 흔적을 남겼다. 팔순 기념 잔치를 기념해 여행을 떠났던 일가족 9명도 모두 영영 돌아오지 못할 여행을 떠나버렸다.

 

 

조문을 마치고 교회에 가서 기도하며 신에게 묻는다. 당신은 그 순간 어디에 있었냐고. 무얼 하고 있었냐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믿는 것이 참된 신앙이라 믿는 이들은 이런 질문 앞에서 답변이 막힐 때마다 낡은 레퍼토리처럼 퉁치는 말이 있다. 그분에게 어떤 뜻이 있어서 그럴 거라고. 하늘에서 쓰시기 위해 데려간 거라고.

글쎄, 세 살짜리 아이를 하늘에 데려다 무슨 일을 위해 쓰겠다는 것일까. 일가족을 모두 데려가 버린 데는 어떤 뜻이 있는 걸까. 난 잘 모르겠다. 헤아려 알아내고 싶지도 않다.

아니, 사실은 당신이 그 순간 어디에 있었는지, 그런 참혹한 광경을 보면서 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지 묻는 것조차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이기에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도 마뜩지 않다. 기도조차 부질없게 느껴진다.

 

 

 

교회 근처의 광화문 광장을 잠시 걸었다. 세종대왕 동상과 오징어게임 홍보 설치물과 거대한 트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광장을 지키고 서있다. 일관된 맥락도 조화로움도 없이 설치된 그 구조물들이 공소해 보인다. 예년 같으면 한 해가 저물고 새해가 저 멀리서 다가오는 시간에 으레 그렇듯이 광장이 인파와 소음으로 달떴겠지만 나라 꼴이 이런지라 드문드문 외국 관광객들만 광장을 오가고 있을 뿐이었다. 드넓은 광장에 쓸쓸한 불빛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올해 우리는 스스럼없고 흔쾌하게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인사를 건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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