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때문에 가끔 엔터 업계 쪽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대개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인사를 하러 온 ‘을’들로부터 의자 등받이에 한껏 몸을 묻은 자세로 인사를 받고 ‘열심히 하라’고 말한다. 혹은 ‘을’들이 먼저 ‘열심히 하겠다’며 허리를 깊이 숙인다. 그럴 때 어떤 ‘갑’들은 이렇게 말한다. 열심히 하는 건 다들 열심히 해. 잘해야지. 팬들 앞에서는, 무대 위에서는 우상으로 대우받는 ‘아이돌’들이지만 연습생 시절이거나 무명 시절일 때의 모습은 대개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허리를 꺾어 인사하는 청년들의 얼굴을 유심히 본다. 그들의 얼굴에는 기대감으로 상기된 표정과 조금이라도 책잡힐 언행을 하지 않기 위해 날을 세운 긴장감이 두꺼운 화장을 뚫고 올라와 팽팽하게 떠 있다. 그들은 음계 ‘솔’에 맞춘 말투와 여러 번의 연습으로 만들어진 입꼬리를 한껏 당겨 올린 미소, 인성까지 철저하게 훈련을 받고 나온다. 나는 그들을 오래 쳐다보지 못하고 그만 고개를 돌리고 만다.
여기, 그런 아이돌 세 명이 제주도로 여행을 떠난다. 그들은 소위 말하는 ‘망돌’이다. 데뷔는 했지만 그들을 알아보는 이들은 별로 없다. 그래도 알아봐 주기를 바라며 버스 안에서 자기에게 관심이 1도 없는 여자를 향해 멋쩍은 미소를 날려 본다. ‘네, 맞아요. 저예요’라고 묻지도 않은 질문에 대답할 준비를 한 채.
그들이 가진 전 재산은 96만 원. 데뷔하고 어느 정도 활동을 했지만 정산은커녕 그중 한 명은 빚만 3천만 원을 떠안고 있다. 소속사가 투자했던 돈을 회수하지 못해 고스란히 당사자에게 빚으로 남은 것이다. 그나마 수중에 가진 돈 96만 원조차 의도치 않은 사건으로 날려버리고 그들은 여행경비를 벌기 위해 귤밭에서 일당을 받으며 일을 한다. 그들 인생에서 처음으로 일한 대가로서 ‘정산’을 받아본 것이다.
그들은 돈을 아끼기 위해 베란다가 근사한 콘도를 나와 캠핑카를 개조한 비좁은 숙소에 머무른다. 왜 캠핑카 숙소일까. 바퀴가 달린 캠핑카의 원래 목적은 어디론가 나아가기 위한 것이다. 그런 목적을 잃고 한곳에 머물러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이 시설은 더 이상 아이돌로서 살아나갈 힘도, 의지도 잃어버린 세 사람의 처지를 상징하는 것 같다.
귤농장에서 일을 하고, 먹고, 자고, 쉬는 이야기 사이로 이들이 통과해 온 아픈 시간들이 드러난다. 매일 아침마다 체중을 재서 조금이라도 기준치를 넘으면 음식을 제한당하는 걸그룹 생활을 해오는 동안 수민은 섭식장애가 생겨서 먹으면 자꾸 토한다. 사랑이는 약에 의존해야 할 만큼 아이돌 생활을 하며 마음을 많이 다쳤다. 무대에 설 때 지나치게 짧은 치마를 입어야 하는 걸그룹 여성들이 생리대를 착용할 수 없어 피임약을 먹고 억지로 생리를 멈추게 한다는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이건 명백한 학대이며 인권 유린이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무대 위에 서기 위해 자신들이 인권을 유린당하고 있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했던 이들은 뭐든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빠져 있다. 특히 수민은 농장주가 ‘그만 해도 된다’고 해도 귤 따는 손길을 멈추지 못한다. 결국 지쳐서 기절하고 만 수민이 비몽사몽간에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라고 중얼거리는 모습은 이 영화의 가장 가슴 아픈 장면.
수민이 텅 빈 운동장을 뛰어가며 축구 골대 네트를 붙들고 폭발할듯한 감정을 애써 억누르는 장면 역시 짠하고 안쓰럽다. 그 넓은 운동장에서 작은 그물망 정도는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는데도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의 처지를 보는 것 같다.
오죽하면 귤농장 주인이 그들에게 이틀 치 일당을 두둑이 챙겨주며 오늘 하루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놀아보라고 권유를 할까. 영화에는 표현되지 않았지만, 영화 상영 후 이어진 대화의 시간에서 감독은 이 인물의 전사를 이렇게 만들어 두었다고 밝혀다. 로스쿨 같은 곳에 계속 떨어져 실패를 여러 번 경험한 사람. 그래서 제주도에 내려와 귤농사를 짓고 있는데, 이 아이들을 보면서 동질감을 느낀다고. 특히 이 인물에는 아이돌들의 실상을 취재하면서 그 앞에서 “어떻게 그래?”라고 화를 내는 대신 뒤돌아서 울고 그들을 이해해 주는 감독 자신의 생각을 투영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이 귤농장 주인과, 이들의 팬이라며 따라다니며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친절을 베푸는 분실물 센터 직원의 모습을 보며 어쩌면 신이 그동안 고단하고 서럽게 살아온 이들에게 보낸 치유의 전령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이건 좀 과할까?)
한편 사랑이는 제주 도착 첫날 트렁크를 잃어버리는데 분실물 센터에서 자신의 것과 똑같이 생겼지만 남의 것인 캐리어를 대신 받아 들고 온다. 그 안에는 가방 주인의 옷이 들어있다. 끝내 자신의 캐리어를 찾지 못한 사랑이는 자신의 옷들(원래의 정체성)을 그곳에 버리고, 새로운 옷(새로운 정체성)을 입는다. 그렇게 그녀는 달라진 모습으로 자신의 길을 새롭게 찾아갈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귤 농장 주인이 세 사람에게 ‘오늘은 그냥 놀아보라’고 말하는 장면이었다. 이건 단지 아이돌이나 청춘들뿐만 아니라 매일 열심히 살아내야 하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닌가. 이제 좀 쉬어도 되지 않겠냐고. 하루쯤 게으르게 산다 해도 아무도 너를 탓하지 않는다고.
그러니 생이 어깨를 짓눌러 기우뚱기우뚱 걸어가고 있는 당신,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한 이 영화를 보며 위로를 받아보라 권하고 싶다.
이 영화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인권 영화 프로젝트로 만든 작품으로, 25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경쟁 부문 대상을 받았다.
● 이 리뷰는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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