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이던가. 한동안 SNS 상에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책에 대한 극찬이 이어졌었다. 충격적이다, 21세기 최고의 도서다, 놀라운 반전이 뒤통수를 친다, 이런 호들갑이 난분분하게 이어져서, 대체 무슨 책이길래 이토록 호들갑인가 싶어서 읽었더랬다.
해서 펼쳐 들고 절반쯤 읽어가는 동안 솔직히 말하면, 당최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생물학자의 전기문인지, 생물 분류학에 대한 이론서인지, 저자 개인의 에세이인지, 이 모든 것들이 맥락 없이 혼재되어 있어서 영 내용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중반쯤 넘어가면서부터는 뜬금없이 추리소설 형식을 띠기 시작한다(이때부터 저자의 개인적인 이야기는 쏙 들어간다). 스탠퍼드 대학의 설립자인 제인의 죽음이 독살인지 아닌지, 그 죽음에 당시 스탠퍼드 대학 총장이었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연관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이 대목에서부터, 전반부에서는 생물학자인 조던의 열성적이고 헌신적인 어류 분류에 대한 필생의 업적을 찬양하는 듯한 저자의 태도와 관점은 갑자기 돌변하기 시작한다.
그가 사실은 매우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이었으며, 무엇보다 우생학의 전파에 앞장선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것이다. 우생학을 철저하게 신봉한 그가 자신의 관점에 따라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가난하거나, 못 배우거나, 지능이 좀 낮다거나, 심지어 남자한테 미쳤다거나, 방랑벽이 있다거나, 상스러운 이야기를 했다고)을 멸절시키기 위해, 여성들을 끌어다가 강제 불임화 시술을 단행하게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미국에서만 무려 2만 명의 여성들이 강제로 불임화 수술을 당했다. 대개 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 여성이거나, 흑인 등 유색인종들인데, 특히 푸에르토리코 출신 여성 중 3분의 1이나 미국 정부에 의해 강제 불임화 수술을 당했다고 한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야만적인 실체를 알게 되면서 저자는 비로소 이 책의 종반부에 들어선 후에야 비로소 내내 하고 싶었던 말을 풀어놓기 시작한다.
인간이란 종 안에서도 누가 누구보다 우등하고 열등한 존재라고 결코 주장할 수 없듯이, 이 자연계 안에서 인간이 동물들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인정한다). 그것은 생물 분류학자들이 인간이 모든 생물들 중에 가장 우월한 존재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만든 계층의 사다리일 뿐, 자연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매우 복잡하고 규정하기 어려운 세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까지 상식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실제와 다르다는 것들을 제시한다. 예컨대, 새들이 사실은 공룡에 해당하며, 버섯은 식물이 아니라 동물에 훨씬 가깝다는 사실. 그리고 마침내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이 이쯤에서 등장한다. 사실 우리가 바닷속에 사는 모든 생물들을 ‘어류’라는 항목으로 분류하지만, 사실은 그들이 단지 바닷속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어류로 퉁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 말을 달리 하면, 산에 사는 모든 동물들, 예를 들어, 염소, 두꺼비, 독수리, 사람을 ‘산어류’라고 분류할 수 있냐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바닷속에 사는 모든 생물들(비늘이 있는 것과 없는 것, 그러니까 광어와 물개와 해삼, 멍게, 말미잘과 조개류)은 각기 다르다. 심지어 ‘육기어류’는 허파가 상체에 있고 꼬리가 아래에 있는 ‘인어’라고 할 수 있어서 인간과 진화적 사촌에 가깝다는 것이다.
사실 오래 전부터 인간이 물고기로부터 진화했다는 설은 존재했었다. 괜히 인어 신화가 생겨난 게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결코 동물들보다 우월한 종이 아니며, 따라서 계층의 사다리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저자는 강조한다. 어떤 기능 면에서는 동물이 인간보다 우월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그런데 이게 새로운 주장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이건 사실 아닌가?).
그리고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뜬금없이 자신이 양성애자임을 밝히면서 자신이 세상이 정한 범주를 부수고 나왔다고 말한다.
이쯤되면 다시 한번 저자가 ‘진정으로’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이 뭔지 또 헷갈리게 된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실체 폭로? 자연에 계층이나 범주의 구획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성정체성도 어떤 범주에 가두려고 하지 말라?
저자의 주장의 무게 중심은 두 번째와 세 번째에 실려있는데 이 주장은 책의 중반부를 넘어가서야 비로소 등장하고, 정작 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은 데이비드 생물학자로서 스타 조던의 공로에 관한 것이어서 좀 어리둥절하게 된다.
사족: 바닷속 생물들을 ‘어류’라는 항목으로 분류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해당 분야 전문가들은 다 알고 있는 것이며, 무엇보다 한국계 미국인 캐럴 계숙 윤이 쓴 <자연에 이름 붙이기>에 자세히 기술돼 있다고 한다(국내 미번역).
그러니, 룰루 밀러라는 저자의 주장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닌데, 이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된 이유는 아마 미국에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란 학자가 그동안 과대평가 돼 있다가 그 실체가 폭로된 덕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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