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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ook

소설 <채식주의자>에 나타난 폭력성 이해하기

소설 <채식주의자>에 나타난 폭력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오래전 이 책을 이미 읽었다고 착각했었다. 알고 보니 10여 년 전에 이 책의 원전(영화로 치면 프리퀄같은)이라고 할 수 있는 한강의 단편 <내 여자의 열매>를 읽었던 것이다. 그때 읽었던 기억에 의하면 신비롭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내가 20여 년 전에 습작했던 단편소설과 설정이 어딘지 좀 비슷하다는 생각도 했었더랬다. 그렇다고 해서 표절 운운할 생각은 없다. 창작의 영역에서는 설정 면에서 어슷비슷한 작품들은 언제나 있어 왔으니까. 각설하고...

 

 

 

<내 여자의 열매>를 읽었을 때는 신비롭고 흥미롭다는 생각이 더 컸지만 그 작품에서 파생된 <채식주의자>를 읽는 과정은 꽤 고통스러웠다. 작가 역시 3부에 해당하는 <나무 불꽃>을 쓰면서 고통 3부작이라는 파일명을 붙였을 정도이니, 읽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쓴 사람에게도 고통스러웠던가 보다.

 

<채식주의자>는 각각 중편으로 다른 문예지에 발표됐던 3개의 작품들을 하나의 장편으로 묶어낸 것이다. 주인공 영혜를 중심으로 해서 그 남편의 시선으로 풀어가는 1채식주의자, 2부 ’몽고반점‘, 3부 ’ 나무 불꽃이 이 소설을 이루고 있다. 그러니까 단 한 번도 영혜의 시점으로 서사가 전개되지는 않지만 타인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영혜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화자인 남편은 아내가 갑자기 채식주의자가 돼서 고기를 일절 안 먹으려 하고 자기에게도 육류 음식을 안 만들어주는 것에 대해 화를 내고 짜증을 낸다. 사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 인물은 한 번도 자신의 아내가 왜 갑자기 그렇게 됐는지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갑자기 채식주의자가 되고 아무 데서나 벌거벗은 몸을 드러내며 자해까지 하는 아내가 부담스러워진 그는 어떤 고민도, 고려도 없이 바로 그녀를 버린다.

 

두 번째 화자인 영혜의 형부는 비디오 아티스트이다. 그는 작가로서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기 위해 고민하던 중 아내로부터 처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아직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 갑작스럽게 그녀에게 성욕을 품게 된다. 결국 그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게 되는데...

 

세 번째 화자인 영혜의 언니 인혜는 남편이 처제에게 저지른 짓을 목도한 후 그와 헤어진다. 그리고 이제는 육식뿐만 아니라 음식 자체를 거부해서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시킨 동생에게 어떻게든 음식을 먹이려고 애를 쓴다. 영혜의 가족 중 누구도 그녀를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지만 인혜만이 유일하게 동생을 이해하려 노력한다(물론 인혜도 동생보다 자신의 아픔이 더 크게 자신을 허물어트렸던 순간이 있었다).

 

 

그러나 영혜의 행동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이해의 영역을 넘어서 버렸다. 그녀는 식물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고 그래서 자신도 식물이 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일체의 음식을 거부하고 식물처럼 물과 햇빛만 흡수하려 한다.

 

사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뿐만 아니라 평범한 정서를 가진 독자라면 누구도 쉽게 영혜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녀가 갑자기 채식주의자가 된 것은 매우 폭력적인 꿈을 꾸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거기에 한 가지 이유를 덧붙이자면, 어린 시절 자신을 물었던 개를 아버지가 매우 끔찍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했던 것을 목격한 경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작가 자신도 밝히고 있듯이 이 소설을 관통하는 키워드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당연히 ’ 폭력‘이 될 것이다.

고기를 거부하는 딸을 때리면서까지 억지로 고기를 먹이려 하는 아버지의 폭력, 아내에 대한 이해 자체를 거부하고 냉정하게 버리는 남편의 폭력 그리고 예술이란 이름으로 다가가 처제의 육체를 난폭하게 범하는 형부의 폭력. 오로지 영혜를 이해하고 끝까지 품으려는 사람은 그녀의 언니 인혜뿐이다. 그런 면에서 얼핏 이 작품에서 페미니즘의 분위기도 감지된다.

 

 

영혜가 식물이 되기 위해 모든 음식을 거부하고 심지어 물구나무를 서서 자신의 팔이 나무처럼 뿌리가 되기를 바라는 모습은 아름답다기보다 다소 기괴하게 읽힌다. 과연 인간이 온전히 식물성을 획득하는 것만이 모든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일까? 물론 사람마다 자신의 환경에서 폭력성을 제거하는 방법이 다르겠지만, 작가는 극단적인 소설적 장치를 통해(말하자면 픽션에서나 존재할만한 인물을 통해) 세상의 모든 폭력성을 거부하고 있다.

 

그러니 이것은 작가가 문학이란 영역 안에서 가장 극단까지 밀어붙여서 표현한 ’ 폭력성에 대한 고발이라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될 일이다. ’ 에이,에이, 세상에 이런 인물이 어디 있어 ‘라고 생각한다면, 미안하지만 당신은 문학을 모르는 것이다. 현실을 똑같이 모사하는 것에 그친다면 문학은 그 존재 의의가 없지 않은가.

 

 그러고보니, 한강 작가가 자신의 작품들을 읽을 때 이 소설을 가장 마지막에 읽으라고 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일단 다른 소설들을 읽어서 문학의 근육을 키워 픽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친 이후에라야 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어서가 아닐까. 혹은 다른 작품들은 이만큼 묘사의 극단성이 낮아서인 것일지도(한강의 다른 작품들 아직 다 읽어보진 않아서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