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중증외상센터>의 인기가 심상치 않다.
사실 그동안 메디컬 드라마가 멜로드라마 못지않게 많이 나왔고, 매번 시청률도 괜찮았다. 하지만 이 드라마처럼 ‘돌풍’이라고 말해도 될 정도의 인기를 얻은 작품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슬의생’ 정도?). 이 드라마는 케이스 별로 에피소드가 진행될 수밖에 없는(연속성이 부족한) 메디컬 드라마임에도 한 번 보면 앉은 자리에서 최소한 3-4회를 내리 보게 만드는 흡입력이 있다. 이 드라마가 왜 이처럼 인기인지 내 나름대로 분석해 봤다.
1. 캐릭터
이 드라마는 명백히 판타지 히어로물이다. 현실에선 찾아보기 힘든 완벽한 실력을 가진 주인공의 종횡무진 대활약. 물론 그동안 메디컬 드라마에서 이런 천재적인 의술을 가진 의사 주인공들은 많았다. 하지만 그 인물들의 빈틈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들은 실력은 물론 오로지 환자를 살리겠다는 투철한 사명감에 가슴 따뜻한 인간미까지 갖췄다. 한마디로, 매력이 없다.
하지만 <중증외상센터>의 백강혁은 다르다. 그는 시건방지고 까탈스럽다. 원작자는 이 캐릭터에 대해 '난폭한 찬사'라고 표현했다.
백강혁은 그저 자신의 생업이 의사이기 때문에 ‘직업적으로’ 사람을 살릴 뿐이다. 아무 데서나 누구에게나 따뜻한 인간미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분쟁 지역에서 총을 들고 사람을 죽인 적도 있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매력적인 인물이다. 특히 그가 시건방을 떨 때마다 매력이 넘쳐 보이는 건 왜일까.
처음엔 응급 환자들 앞에서 어리버리했지만 점차 외과의로서 성장해 가는 양재원, 이미 프로 간호사로서 실력과 순발력을 갖춘 천장미, 그리고 미워할 수 없는 코믹한 악인 한유림 등의 캐릭터들도 매력적이다.
![](https://blog.kakaocdn.net/dn/dS3Eca/btsL59c3vYm/Xq6EKKIwbZcyQe0lRe116K/img.jpg)
2. 러닝타임
이 드라마는 50분 물 8부작이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 이틀 만에 다 볼 수 있는 분량이다. 그래서인지 군더더기가 없다. 환자들의 개인 사연을 풀어놓으며 시청자들에게 억지 신파 감동을 강요하지 않는다. 의사들을 중심으로 이들이 어떻게 그토록 긴박한 상황 속에서 환자들을 살려내는지에만 집중한다. 자연히 속도감이 있다.
3. NO 고구마, YES 사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드라마의 고질병(?)이라고 할 수 있었던 요소 중 하나가 시청자들에게 일명 ‘고구마’를 먹이는 것이었다. 작가는 주인공을 억울해서 팔짝 뛸 상황에 밀어넣고 끊임없이 시련에 빠트린다. 예컨대,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을 마침내 만나게 되는 순간, 바로 눈앞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기억 상실증에 걸린다든지, 주인공을 시기 질투하는 빌런의 덫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하는 식이었다.
사실 극작술의 기본은, 주인공이 온갖 시련과 고난을 이겨내고 마침내 승리하거나 성공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의 시청자들은 그런 전개를 원치 않는다. 주인공은 시원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이겨주기를 원한다. 왜? 내가 처한 현실도 때로는 시궁창이고 덫인데 스트레스를 풀려고 보는 드라마에서까지 그런 꼴을 봐야 해? 그런 심리가 작동하는 것 같다.
이 드라마, 시청자들의 그런 취향을 반영해서 오로지 처음부터 끝까지 사이다, 사이다, 사이다만 시청자의 입에 퍼부어준다. 주인공은 실력도 뛰어나지만 빌런들의 방해 공작에 걸려 넘어지지도 않는다. 뒤에서 그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더 힘이 센 인물(보건복지부 장관)이 있기 때문이다.
환자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이용한 부자연스러운 휴머니즘이나 신파 정서로 끌고 가지도 않는다. 진지하거나 심각하지 않다. 주인공들은 유쾌하게 일을 해결해 나간다. 요즘 젊은 층의 취향에 딱 맞다.
![](https://blog.kakaocdn.net/dn/bZR9yL/btsL6BmAvyL/y5eeV0fpTKRNisBnD9ncv1/img.webp)
4. 병원 경영진 vs. 의사
이 부분은 인기 요인은 아니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갈 부분이다. 역시 이 드라마에서도 우리나라 중증외상 치료의 고질적인 문제가 등장한다. 환자들을 치료할수록 병원은 적자를 떠안을 수밖에 없는 구조. 그러니 병원 운영진이 주인공을 밀어내려 하는 행동을 마냥 욕할 수만은 없다.
결국 이 문제는 정부에서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현재 외상 치료의 낮은 수가를 상향 조정하고 병원들을 지원해줘야 한다. 왜 우리나라는 전 국민 무료 암 검진에는 그처럼 인심 좋게 지원을 해주면서 외상 환자들에 대한 지원은 제대로 해주지 않는 걸까. 누구나, 어디서나 당할 수 있는 것이 중증 외상이다. 오히려 암 환자보다 훨씬 발병률이 높다.
오늘 자 기사를 보니, 중증 외상을 치료하는 의사를 전문적으로 육성하는 국내 유일의 수련센터가 이달 말에 운영을 중단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유가 기가 막히다. 복지부의 2025년도 예산이 국회 제출안보다 약 1655억 원 줄어든 125조 5000억 원으로 책정되면서 이 사업비가 전액 삭감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동안 정부가 이 센터에 지원해왔던 연간 9억 원(꼴랑!)의 예산이 올해 지급되지 않았다고 한다.
대체 이 정부가 제대로 하는 일이 뭔가. 의사들이 아무리 사명감을 갖고 그 고된 중증 외상 환자들을 치료하려 해도 정부가 이렇게 외면한다면 다 헛일이다.
기사 내용 참조: https://www.sedaily.com/NewsView/2GOU8MNN2H
[단독] 국내 유일 '외상센터 수련기관' 문 닫는다
사회 > 사회일반 뉴스: 넷플릭스 드라마 ‘중증외상센터’의 주인공 백강혁 같은 외상전문의를 육성해오던 국내 유일의 수련센터가 11년 만에 문을 닫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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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사족
양재원 역을 맡은 추영우의 인기가 수직 상승 중이다. 그의 연기를 칭찬하는 목소리들이 많이 들려온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별로. 무엇보다 너무 오버 연기를 한다. 일례로, 양재원이 빈 교실에서 책을 볼 때 뒤에 몰래 다가온 백강혁이 말을 걸자 놀라는 연기를 보라. 그렇게 비명까지 질러가며 호들갑스럽게 놀랄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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