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나리> - 보편성의 힘
영화 <미나리>의 줄거리는 매우 간단하다. 한 줄의 로그 라인으로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미국의 한 시골 마을에 정착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어느 한인 가족의 이야기.
영화의 제목 ‘미나리’를 영어 발음으로 쓴 ‘Minari’를 처음 봤을 때, ‘Minority’와 발음이 비슷해서, 미국 내에서 소수 인종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압박과 설움 같은 것을 그린 건 줄로 알았다. 그래서 아무 데서나 잘 자라는 미나리의 특성도 살리고 minority의 의미도 잘 살려서 ‘중의적인 의미의 제목으로 잘 지었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 그건 나의 오해라는 것을 알게 됐다. Minari는 그저 아무 데나 뿌려놓아도 튼실하게 뿌리를 내리고 잘 살아가는 미나리에 빗댄 한 가족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앞서 썼듯이 이 영화의 줄거리는 비교적 단순한 편이다. 미국의 한 시골 마을에 정착해서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어느 한인 가족의 이야기인데, 거기에 한 줄 더 덧붙이자면, 한국에서 온 외할머니와 미국 땅에서 자란 아이들 사이의 문화적 충돌 정도가 되겠다.
그런데 이 배경을 한국의 어느 시골 마을로 갖다 놓아도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거의 무리가 없다. 서울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귀농한 어느 가족이 그곳에 뿌리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 도시 아이들인 손주들과 시골 할머니 사이의 문화적 충돌.(이렇게 썼다고 해서 이 영화를 폄하하려는 의도는 없다.)
이 말인즉슨, 이 영화가 매우 보편적(universal)인 이야기란 뜻이다. 동시에 매우 미국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미국이란 나라에서, 이 영화의 가족과 비슷한 사연을 갖지 않은 가정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이 영화가 그처럼 많은 미국인들의 공감을 사고 미국 내 수많은 영화제에서 상을 휩쓴 이유는. 대부분 자기 집안의 이야기로 받아들인 것 같다.
누군가 원래 살던 터전을 떠나 새로운 곳에 정착하려고 할 때, 특히 ’맨 땅에 헤딩‘ 식으로 뭔가를 개척하려 할 때 왜 고난이 없고 시련이 없겠는가. 그것을 이겨내고 마침내 크고 작은 성과를 거둘 때 맛보는 성취감과 환희라는 것은 만고 이래 성공 스토리의 기본 뼈대이다. 그런데, 이것은 이 영화의 장점이자 취약한 요소가 될 수도 있다. 자칫하면 그저 흔하고 뻔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백인들만 사는 시골 마을에서 매우 보기 드문 동양인 가족으로서 겪는 차별이나 편견 같은 것이 거의 그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영화가 더 밋밋해 보일 수도 있다(그래서 무리 없이 미국인들 사이에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고).
교회에 이 가족이 처음 출석했을 때, 백인 아이가 처음 본 동양인 아이를 보고 “넌 왜 얼굴이 그렇게 납작하냐?”고 물어보는 장면 정도가 유일한 인종 문제로 잠시 등장하는데, 이조차 그저 백인 아이의 호기심 정도로 다룰 뿐이다. 이것은 마치, 한국인만 사는 어느 시골 마을에 와서 살게 된 어느 백인 아이에게, “넌 왜 이목구비가 그렇게 큼직 큼직해?”라고 묻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리고 두 아이는 금방 절친이 된다. 그러니 인종 갈등도 패스.
이처럼 큰 사건이나 충돌이 없는 이야기의 밋밋함을 상쇄하기 위해 이 작품이 취한 영리한 전략은, 한국에서 온 외할머니와 손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갈등과 뜻밖의 유머에 있다. 처음 본 할머니의 기이한 한국식 풍습과 낯선 ’한국 할머니 냄새‘ 때문에, 노골적으로 ’할머니가 싫다‘고 말하는 손자의 악동 짓에서 밉지 않은 웃음이 터져 나온다.
이 영화 안에 큰 충돌은 없지만, 인물들 사이에 갈등은 존재한다. 특히 도시에서 살던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와서 척박한 시골 땅을 개척하려는 남편과, 심장이 약한 아들이 걱정돼서 도시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아내 사이의 갈등이 그것이다.
이 둘은 줄곧 서로를 한국식 호칭으로 큰 아이의 이름을 붙여 ’지영 엄마‘, ’지영 아빠‘라고 부른다. 그런데 영화의 후반부, 이 가족에게 큰 재난이 닥쳤을 때는 서로를 ’여보‘라고 부른다. 가족은, 특히 부부는 그런 것인가 보다. 평소엔 덤덤하다가도 가정을 뒤흔드는 큰 시련이 닥쳤을 때 서로에 대한 믿음과 애정이 더욱 단단해지는.
기사를 찾아보니, 이 호칭 부분은 배우 한예리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애초에 감독은 부부의 호칭을 ’자기‘라고 했지만, 예전의 한국인 부부들은 ’아무개 아빠/엄마‘로 불렀다고. 감독이 그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상황에 따라 호칭을 달리 부여한 이 아이디어는 결과적으로 의미 있게 작동하게 됐다.
영화의 후반부, 처음엔 그토록 할머니를 밀어내던 손자는 아픈 할머니에게 누구보다 먼저 다가간다. 할머니의 손을 잡아끌며 ’우리 집으로 같이 가자‘고 하는 장면. 그리고 큰 시련을 겪고 난 후 온 가족이 거실 바닥에 누워 서로의 몸에 팔을 두르고 있는 장면에서 ’이것이 바로 가족의 힘이구나!‘를 느끼고 눈시울이 뜨끈해지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런 힘이 있기에, 그 힘을 믿기에 우린 크게 쓰러지고 넘어져도 다시 털고 일어나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진부하지만, 그것은 밀어낼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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