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작품들을 읽는다는 것은 대체로 고통스럽거나 무겁거나 어두운 감정을 견뎌야 하는 일이다. 그녀의 소설들 중 세 번째로 읽은 <검은 사슴>도 그다지 예외가 아니었다. 다만 앞서 읽었던 두 작품 <소년이 온다>와 <채식주의자>에 비하면 그 무게와 질감이 좀 덜 무겁고 좀 덜 어두웠을 뿐.
서사 구조는 간단하다.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잡지사 사진기자인 인영, 예전에는 소설을 썼지만 지금은 거의 절필하고 번역 일로 생계를 이어가는 명윤, 그리고 제약회사 사환인 의선. 어느 날 한낮의 햇빛이 내리쬐는 도심 거리를 벌거벗은 채 질주하던 의선은 그 일이 있은 후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사라진다. 인영과 명윤은 의선이 알려준 빈약한 정보를 갖고 그녀를 찾아 강원도의 어느 폐광촌으로 향한다. 그 길목에서 두 사람은 탄광 사진만 찍는 사진작가 ‘장’을 취재차 만나게 된다.
이야기의 전개는 기본적으로 사라진 인물을 찾아 그 행적을 쫓아가는 ‘추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대개 이런 구조의 소설에 기대하기 마련인 아슬아슬하고 쫄깃한 긴장감 같은 것은 없다. 그저 두 사람의 여정 사이로 그들에게 화인처럼 새겨진 과거의 아픈 사연과 현재의 지리멸렬한 삶들이 교차되면서 더디게 나아갈 뿐이다. 한강 작가의 소설 전개 화법의 특징인지 모르겠으나 이 소설에서도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가 1인칭과 3인칭을 오가며 챕터가 바뀔 때마다 달라진다.
이 소설의 제목인 ‘검은 사슴’은 깊은 땅속에서 살아가는 환상의 동물이다. 아름답고 단단한 뿔과 뾰족한 이빨을 지닌 이 짐승의 소원은 땅속을 벗어나 단 한 번이라도 하늘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광부들에게 밖으로 나가는 길을 알려달라고 하지만 그 대가로 뿔과 이빨을 광부들에게 내어주고 오히려 더 깊은 심연 속으로 굴러 떨어져 죽는다.
검은 사슴이라는, 세상에 실재하지 않는 이 동물은 명백하게 의선을 상징한다. 이 소설의 인물들은 각각 대조적인 면에서 상징성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의선은 빛보다 어두움이 더 익숙한 곳에서 성장기를 보냈지만 그 반작용일까, 빛을 갈구하며 좁은 곳보다 탁 트인 넓은 곳을 좋아하는 인물이다. 그에 반해, 인영은 어둠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넓은 곳보다 좁은 곳에서 편안함을 느끼며 밝은 곳보다 어두운 곳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장’은 빛의 예술인 사진을 찍지만 어두운 암실에서 비로소 작품을 만들어낸다.
그런가 하면, 이 인물들에게는 공통점도 있다. 주요 인물들에게는 예외 없이 가족 중 한 명이 떠났다는 공통의 아픔을 갖고 있다. 명윤은 여동생이 가출했고, 인영의 언니는 바다에서 실종돼서(죽은 것이 분명한) 가족을 떠났다. 장의 아내도 남편을 떠났다. 의선의 아버지는 떠나간 아내를 찾아 집을 나갔고 의선 역시 하나 남은 가족인 오빠를 버려두고 집을 떠났다. 의선의 오빠는 지능을 잃었고, 명윤의 아버지 역시 지능을 잃었다.
의선은 ‘연’에 집착한다. 그녀가 살았던 그 고립된 마을 골짜기에는 끈 떨어진 연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의선이 광화문역 가판대에서 연을 훔쳐 달아난 행위는,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했던 어둡고 고립된 고향집으로 회귀하고 싶은 소망의 표현일 것이다.
흥미롭게도 의선이란 인물에게서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의 모습이 상당 부분 겹쳐 보인다.. 작가가 이 인물을 발전시켜서 영혜라는 인물을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우 흡사한 캐릭터이다(개인적으로 이 기괴한 백치 같은 캐릭터가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작가가 이 인물을 마치 자신의 페르소나처럼 계속 활용하는 것인지 혹은 평소 다양한 인물 군상에 대한 경험이나 조사가 덜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판단 보류.
이 소설의 후반부에는 다소 뜬금없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주인공들이 내내 깊은 심연이나 바닥 모를 검은 우물 같은 곳에서 제 자리를 맴도는 것처럼 이야기가 느리게 흘러가더니 후반부에서 갑자기 장이 강도짓을 저지르고, 대형 열차 사고가 일어나 인영이 중상을 입는 등 그전까지 전개되던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 펼쳐진다. 마치 1부의 문을 닫고 전혀 다른 스타일의(마치 상업 영화 같은) 2부가 전개되는 것 같다.
혹시 작가가 내내 어두운 이야기를 써내려 가다가 그 암울한 정서에서 스스로 벗어나고 싶었던 걸까. 마치 무 자르듯 전혀 다른 스타일의 서사 전개가 좀 뜨악했을 정도였다(무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작품에 ‘감히’ 이렇게 딴지를 걸어본다).
그나저나 독서 모임에서 1년 동안 ‘한강 읽기’를 한다고 해서 읽고 있지만, 이제 검고 어둡고 무거운 한강의 소설들은 그만 읽어야겠다. 그녀의 작품들을 읽고 나면 그 어두운 분위기에 전염된 듯 하루 이틀 정도 기분이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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